‘공적 행복’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혁명론』 제3장 ‘행복의 추구’에서 미국 혁명기 당시 미국인들의 정치활동 경험을 설명하면서 강조한 용어이다. 간단히 말해 이는 정치적 자유를 실천함으로써 개인이 누리는 행복감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행복은 개인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느낌을 지칭한다. 특히 원자론적 개인주의가 심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대중들의 행복론이 유행이다. 그러나 ‘나’의 주관적 기호와 만족의 준거는 개인의 일생에서 매순간 달라지므로 이러한 행복론은 사실 많은 것은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가령 영어 단어 happy의 어원에 ‘hap(운)’이 내포되어 있듯이, 대부분의 통속적 견해에서 행복은 외부에서 뜻밖에 주어지는 것에 대한 수동적 수용을 뜻할 뿐이다. 따라서 많은 철학자들의 행복론은 통속적 행복론에 반대한다. 대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을 객관적인 가치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인간의 기능, 덕에 대한 탁월한 수행으로서, 단순한 주관적, 심리적 만족 상태가 아닌 행동의 궁극적, 자족적 목적이다.
아렌트가 강조한 ‘공적 행복’ 역시 개인주의적 행복론과는 다르다. 서양근대에서는 오랫동안 개인의 행복을 공적인 요구와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경계해왔다. 이는 일정 부분 중세의 종교적 권위에 저항하여 근대의 개인성을 발전시키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아렌트에 따르면 개인의 행복을 주관적 판단에 맡기는 것은 행복한 삶의 공적 차원을 등한시하여 좋은 인간 및 사회를 향한 전망을 어둡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즉 근대의 문제점은 공적 행복의 상실이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여러 활동들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동(action) 셋으로 구별하였다. 여기서 노동은 인간의 생물학적 존속, 즉 생명유지에 필요한 신진대사에 관련된 행위로서, 인간의 동물적 차원에 상응한다. 작업의 경우 직접적 생존을 조금 넘어선 생활을 위해 필요한 물품들, 가령 집, 가구 등을 생산하는 활동을 뜻한다. 노동이 생명 유지라는 긴급한 필연성(필요)을 충족시키는 행위라면, 작업은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생산이라는 점이 다르기는 하나, 이 두 행위는 공통적으로 인간이 어떤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로서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은 여럿이 살아간다는 점에서 복수성을 특징으로 하며, 그러한 인간들 서로 간의 어울림을 통해 각자가 자기 고유한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는 바로 행동이다. 노동과 작업 역시 다수의 인간들의 협력으로 수행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수성이 ‘사회적인 것’이라면, 행동은 ‘공적인 것’,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것에 해당한다. 아렌트가 보기에 근대 이후의 ‘국민경제’는 본래는 사적인 것에 불과한 가정(oikos)의 노동이 국가의 관심사가 되어 경제(oikonome)가 된 것이다. 이처럼 근대 이후 ‘사회적인 것’이 ‘공적인 것’의 영역에 개입하여 그것을 잠식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아렌트의 주된 문제의식이었다.
공적 행복은 복수성을 특징으로 하는 인간들이 자유로운 정치행동을 통해 공공의 문제에 참여하는 가운데 느껴지는 행복이다. 정치적 자유의 향유에서 성립하는 이 행복을 아렌트는 마로 미국 혁명에서 발견한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경우 처음의 목표였던 자유가 점차 사적인 행복이라는 다른 목표에 의해 대체되어버렸다고 지적한다. 그가 생존에 관한 사적인 자유와 행복 자체를 불필요하게 여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가정 안에서 생명의 기본적 필요에 대한 충족이 공적 행복 실현의 전제조건이라 생각했다. 다만 그는 삶, 생존 등이 최우선의 가치라고 보는 입장이 정치적 자유가 본질적으로 내포하는 다원성을 축소시키고, 공적 영역을 위축시켜 정치 행위를 소멸시킬 수 있으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사회적인 것’의 필연성의 힘이 ‘공적인 것’의 자유를 압도한 프랑스 혁명과 달리, 미국의 혁명은 주민들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토의, 숙고, 결정’ 이라는 공적 공간에서의 행위 자체를 만족하여 정치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렌트는 『혁명론』에서, “누구라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 자신의 알고 있는 범위 안의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말을 들어 주고, 말을 걸어주고 인정하고, 존경할 것을 바라는 강한 욕망으로 움직이는 것을 본다.”고 강조하였다. 타인과의 관계 자체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 곧 정치라는 것이다. 헌법(Constitution)은 이 정치적 본성에서 발현된 정치적 공간의 제도적 조직화로 이해된다. 미국 혁명기에 미국 시민들에 의해 경험된 공적 행복은 이러한 정치적 자유의 향수에서 기인하는 감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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