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대한 권리’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자이자 도시학자인 앙리 르페브르의 개념이다. 철학자로서 그는 본래 변증법적 유물론을 지지하여 헤겔과 마르크스에 관심을 가졌으며, 나치 치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는 등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 또한 가졌다. 그는 장년기까지는 주로 농촌 문제 및 일상성 비판에 착수했으며, 노년에 도시 연구에 몰두하여 60년대 도시문제에 관한 많은 저작들을 남겼다. ‘도시에 관한 권리’는 그 저작들 중 하나이며, 책 제목 자체가 프랑스 68혁명 당시 하나의 시위 구호로서 사용될 만큼 당대 도시 문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60년대 프랑스는 농촌 주민들과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대도시로 몰려드는 급격한 도시화를 겪었다. 이는 주택 부족 문제를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거주지에 대해 ‘교환가치 논리’를 적용함에 따라 주택 가격이 폭등하여 시민들의 일상적 생활공간인 도시의 ‘사용가치’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대도시 인근에 대규모 임대주택 단지를 건설하였으나 이는 그곳의 거주자들을 도시 중심부로부터 공간적으로 격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앙리 르페브르는 도시 거주자들이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권리인 ‘도시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도시는 본질적으로 ‘제품’보다는 ‘작품’(예술 작품과 같은)에 비교될 만하다. ‘제품’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교환가치’를 부여받는 것이지만 ‘작품’은 자본주의 체제나 산업화 이전부터 시민의 일상생활에 내재하는 ‘사용가치’를 가진다. 즉 그는 도시를 ‘작품’에 비교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에서 점차 교환가치로 대체되어버린 도시의 사용가치에 대한 회복을 강조한 것이다.
도시거주자들은 자신들의 공동 작품인 도시에 대해 ‘전유 (appropriation)의 권리’, 그리고 도시 행정에 대한 ‘참여의 권리’ 등을 가진다. ‘전유’는 일반적인 사물 ‘소유’와 구별하기 위해 선택된 용어이다. 한 개인이 배타적으로 가지고 시장에서 상품으로 매매할 수 있는 권리가 ‘소유권’이라면 전유는 다수의 도시 거주자들의 공동 작품인 도시 공간에 대한 일상적 향유, 사용의 권리이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전유를 위해서는 도시 사용에 관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권리, 즉 ‘참여의 권리’가 요구된다. 바람직한 도시 생활은 거주자들이 도시의 모든 영역에 적극 참여하여 자신의 요구를 주장할 수 있는 조건에서 가능하다. 르페브르가 말하는 권리의 주체, ‘도시 거주자’는 근대적 의미의 시민권자와도 다르다. 시민권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형성된 근대 국민국가의 영토 단위 내의 국민들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나 르페브르는 정치공동체의 소속감이 도시 거주자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면서 거주자의 권리를 근대 시민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르페브르의 철학적 개념은 사상적으로 다소 사변적이고 난해한 면이 있으나, 실천적으로 사회 운동의 구호로 사용될 만큼 사회 변혁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후 도시에 관한 연구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실제로 이 개념은 프랑스를 넘어 세계 각국으로, 특히 라틴아메리카에 큰 영향을 미쳐서, 가령 브라질의 경우 도시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을 제정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유엔(UN) 산하 기구인 유네스코와 해비타트(HABITAT)는 ‘도시에 대한 권리’에 관한 여러 정책들을 구상하여 관련된 정책들을 보급하고 있다. 이처럼 르페브르의 도시사상은 부동산 자본의 이윤 추구 논리가 거주자들의 생활 편익을 압도하는 최근의 신자유주의 경향에 대항하기 위한 담론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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