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이었던 독일과 일본. 그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후손들이 조상들의 국가 잘못에 책임을 질 필요가 있을까?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 총리들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 때마다 논란이 일어나는데, 문제의 핵심에는 바로 이 물음이 숨어 있다. 과연 국가 범죄 이후에 태어난 후손들은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가지지 않는가? 가진다면 얼만큼, 어떤 의미에서 가지는가? 우리나라 사람들 중 일부는 일본을 비난하기 위해 독일을 모범적 사례로 제시하곤 하는데, 사실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유럽 선진국들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건 아니다. 그 나라들도 식민지 지배 이력이 있고, 그 사실을 좀처럼 공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편이며, 하더라도 사과로 이어지거나 실제적인 보상으로 이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죄의 문제』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저지른 잔혹행위에 대한 독일인의 책임 문제를 포괄적으로 검토하였다. 나치시대 동안 독일이 저지를 죄에 대해 전후 독일인은 책임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의 책임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야스퍼스의 답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그는 한 민족 전체를 범죄자로 낙인찍는 ‘집단적 죄’ 담론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인의 죄와 책임의 성격을 자신의 철학적 성찰을 통해 규명한다.
(1) ‘집단적 죄’ 담론 비판
전쟁이 종결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나치의 죄를 독일 민족성에 결부시키거나 독일 민족 전체를 유죄로 보는 견해들이 많이 등장했다. ‘집단적 죄’는 이처럼 어떤 잘못된 행위를 저지른 사람이 속한 집단 전체에게 그 잘못의 책임을 묻는 개념이다. 야스퍼스가 ‘집단적 죄’의 관점을 거부한 이유는 그것이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속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개인적 주체가 확립된 근대 이후부터 서구에서 죄의 주체는 개인으로 간주되었다. 죄는 범이나 도덕에 대한 위반인데, 이러한 위반은 개인의 자유의지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행위의 책임을 그 행위의 장본인인 개임에게 묻는 것은 근대의 진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전근대의 경우 개인과 집단의 미분화 탓에, 개인은 자기가 직접 저지르지 않은 행위에 대해서도 집단귀속성을 이유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
야스퍼스는 나치의 만행에 대해 독일인이 전적으로 결백하다고 보지는 않았으나, 개인을 집단으로 환원하는 ‘집단적 죄’의 개념은 부당하고 또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민족은 개별 인간을 포괄하는 ‘유개념’이기보다는 개별 인간이 다소 그에 상응할 뿐인 ‘유형개념’이다. 따라서 민족은 개인과 다르게 특정 도덕적 특징을 가지고 독자적 행동 능력을 가지는 주체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야스퍼스는 ‘집단적 죄’에 입각한 독일인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은 유대인 전체에 대한 나치의 민족적 편견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릇된 실체화’이며, 근대의 법과 도덕으로부터 전근대적 집단주의로 퇴행하는 것이라 지적한다.
(2) 나치에 대한 독일 민족의 책임
그러나 ‘집단적 죄’에 대한 비판이 곧 독일인들의 무죄 주장인 것은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 야스퍼스가 ‘집단적 죄’에 대해 부정한 것을 두고, 그가 뉘른베르크재판을 승자재판으로 왜곡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야스퍼스의 의도는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 전근대적 ‘집단적 죄’와는 다른 논거에서 독일인들의 죄와 책임을 논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독일인의 죄를 전근대적 집단적 죄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 설명할 수 있는가? 야스퍼스는 죄를 ‘법적 죄’, ‘정치적 죄’, ‘도덕적 죄’, ‘형이상학적 죄’로 구별하여 이에 답한다. 앞의 두 죄가 외적 기준에 의해 추궁된다면, 뒤의 두 죄는 내적 양심에 의해 판단된다.
우선 ‘법적 죄’에 관하여, 야스퍼스는 ‘집단적 죄’에 반박하는 논리에 따라, 나치범죄와 관련한 ‘법적 죄 및 책임’이 나치 지도층에게 있으며 독일인 전부에게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의 의의가 전쟁과 학살 등에 대한 국제법적 법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독일 민족 전체에 법적 유죄 판결을 내리지 않은 것에도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야스퍼스에 따르면 독일 민족은 나치범죄에 대해 ‘법적 책임’은 지지 않더라도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민권을 가진 정치공동체의 일원인 한에서 그러한 범죄적 정권을 용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도 어떤 의미로는 ‘집단귀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근대적 집단적 죄가 언어, 출신, 문화 등 민족적 동질성에 따라 부과되는 반면, 이러한 정치적 죄는 “누구나 자기 정부에 대해 공동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공동체에 부과되므로, 그 둘은 구별되어야 한다. 야스퍼스는 정치에서는 의도가 아닌 결과가 중요하다는 관점에 입각하여, 심지어 나치에 저항한 국가구성원에게도 이러한 정치적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정치적 죄가 외부의 법정에 의해 추궁당한다면, 도덕적 판단은 개인 양심의 문제이다. 나치 당시 많은 독일인들은 경제적 생존 및 성공을 위해 나치의 범죄적 성격을 외면하고 애써 좋은 면만을 보려 했다. 이처럼 폭력과 고통에 대한 무감각과 방관이라는 수동성이 도덕적 죄의 특징이다. 야스퍼스는 법적 죄나 정치적 죄에 대해서는 외부적 개입의 효과를 인정했으나 도덕적 죄에 대해서는 ‘내부로부터의 고발’에 각자 귀 기울일 것을 강조했다. 형이상학적 죄 역시 법이나 정치적 차원의 죄와는 구별된다. 그러나 도덕적 죄와 달리 형이상학적 죄는 ‘인간 사이의 절대적 연대’를 전제한다. 만일 압도적 폭력으로 인해 자신의 희생이 타인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않을 때라면 도덕적 죄에 대해서는 면제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무력성이 형이상학적 차원의 죄까지 면제하지는 않는다. 인간 간의 절대적 연대가 마치 형이상학적 정언명령처럼 존재하여, 살아남은 자는 희생된 자에 대한 죄의식과 책임감을 보편적 차원에서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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