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정치(王道政治)와 패도정치(覇道政治)
왕도정치와 패도정치는 제왕이 나라를 통치하던 왕조시대(王朝時代)의 두 정치사상이다. 공자와 그 제자인 유가(儒家)가 왕도정치를 이상적 정치 모델로 삼았다면, 법가(法家)와 최고 권력자 계층은 패도정치를 지지하였다.
(1) 왕도정치
맹자에 따르면 왕도정치는 인(仁 : 사랑)과 의(義 : 올바름)를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이다. 패도정치는 천하를 장악하기 위해 권세와 무력을 사용하나, 맹자의 관점에서는 인정(仁政)이야말로, 그러한 권세와 무력에 비교되지 않는 강력한 힘이었다.
“천하에 올바른 도(道)가 행해지면 덕(德)이 없는 사람이 덕(德) 있는 사람을 섬기고, 현명하지 않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을 섬긴다. 반면 천하에 올바른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고,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를 섬기게 된다. 이 두 가지는 자연의 이치로서, 이것을 따르는 자는 존속하나 그렇지 않은 자는 멸망한다.” - 맹자, 『맹자』 「이루 상」편
순자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패도정치를 비판하고 왕도정치를 이상적 통치 원리로 간주하였다. 그에 따르면 패자는 강한 무력을 동원하여 이웃 나라를 정벌하려 하나, 이 과정에서 민심을 잃고 다른 제후들의 원망을 얻는다. 즉 힘만으로 강대국이 되려 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며 위험하기까지 한 것이다. 패자보다는 왕자가 더 강한 국가를 통치할 수 있다. 왕자의 수단은 힘이 아닌 인(仁) 의(義), 위엄이다. 인과 의로 사람을 대하므로 모든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돌릴 수 있으며, 위엄을 통해 싸움 없이 상대의 굴복을 얻어낼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왕도정치를 무너뜨린 패도정치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권세와 무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려 한 패자의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춘추오패(春秋五覇), 즉 제환공, 진문공, 진목공, 초장왕, 월부차이다. 맹자는 이 오패의 패도정치 자체를 입에 담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겼으며 그들을 혼란과 분쟁의 장본인으로만 여겼다. 맹자보다 더 혼란스런 시대를 살았던 순자는 그만큼 더 오패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2) 패도정치
패도정치를 주장한 대표적 인물로는 법가의 상앙과 한비자가 있다. 이들은 인의(仁義)를 강조하는 왕도정치로는 천하의 통치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힘에 의한 통치를 주장했다.
상앙에 따르면 통치자가 아무리 인과 의로 사람들을 대하더라도 결국 모든 사람이 인과 의를 따르게 만들 수는 없다. 따라서 통치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힘과 무력, 부국강병이다. 그리고 부국강병을 위해 백성 모두가 농사와 전쟁에 전념하게 하려면 인의에 의한 통치보다는 법(法)에 의한 통치가 요구된다.
한비자(韓非子) 역시 왕도정치의 무용성을 지적하고 천하의 모든 일이 힘에 의해 다스려짐을 역설하였다.
“상대 국가와 비슷한 힘을 가진 나라의 통치자는 상대편이 자기 나라의 도의(道義)를 떠받든다고 해도, 상대 국가를 굴복시켜 신하로 삼기 어렵다. 그러나 속국(屬國)의 제후라면 비록 종주국(宗主國)의 통치자가 하는 일에 반대한다 해도, 반드시 공물(貢物)을 가지고 들어오게 할 수 있다. 이처럼 이쪽의 힘이 강하면 사람들은 이쪽으로 굽혀 들어오고, 이쪽의 힘이 약하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사람을 보내 굽히게 된다 . 그래서 현명한 통치자는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 - 한비자 , 『 한비자 』 「 현학 ( 顯學 ) 」 편
실제로 춘추전국시대의 제후들은 왕도정치보다는 이러한 패도정치를 선호했다. 예를 들면 위(魏)나라(양나라)의 혜왕(惠王)이나 제(齊)나라의 선왕(宣王) 모두 맹자를 만났을 때 패도정치에 대해서 먼저 관심을 보였고 그에 대해 물었다. 그만큼 당대는 침략과 정복전쟁으로 인한 혼란기였다. 한비자는 이런 점에서 인의를 국가 통치에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