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주권: 로크, 칸트, 하버마스
오늘날 인권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권에 관한 여러 국제조약들이 체결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흐름은 인권문제가 더 이상 특정 국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인식의 확산을 반영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국제사회가 특정 국가의 인권침해 상황에 개입할 때, 그리고 특히 이 개입이 무력을 동반할 때, 국가주권과 인권이라는 두 가치가 충돌하게 된다.
인권과 주권의 관계에 대해서는 철학자들 역시 다양한 견해를 제시한다. 로크의 경우 소유권을 강조하는 개인주의를 통해 국가주권에 대한 인권의 우위를 강조하였으며, 칸트는 인권이 국가에 의해 더 완전히 구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하버마스의 경우 현대의 국내외 국가주권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세계 시민적 권리로서의 인권을 강조하였다.
(1) 로크
주권과 인권에 대한 로크의 설명은 그의 사회계약론에 근거를 둔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적 주권자이며 모든 개인은 생명, 자유, 재산이라는 세 항목의 소유권을 기본권으로 가진다. 그러나 자연 상태에서는 각자의 자연권을 보호할 법률, 공정한 재판관, 집행력을 가진 권력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기본 인권에 대한 실질적 보장은 불안정하다. 따라서 각 개인이 인권의 확실한 보장을 위해 자연법 집행권리의 일부를 양도하고 공통권력 행사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국가의 기원이다. 국가의 역할은 이처럼 소유권으로서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다.
로크에 따르면 개인들이 계약을 통해 국가를 성립시키면서 국가에 양도하는 것은 자연법을 집행하는 권리에 관한 것일 뿐, 생명, 자유, 재산을 소유할 실질적 인권 자체는 양도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계약을 통해 형성된 국가의 주권은 개인의 인권으로서의 소유권을 보존하기 위해서만 존립한다. 만일 국가가 그러한 인권 보호의 기능을 상실한다면 국민의 저항권 행사는 정당하다고 간주된다.
(2) 칸트
로크의 견해에서 국가주권은 단지 개인의 소유권을 보호하는 소극적 지위만을 가지며, 인권은 국가 주권보다 우위에 놓인다. 반면 칸트는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면서도 국가 주권 역시 중요하게 여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적 상태에서 타고난 자유를 타인의 자유와 보편적 법칙과 함께 양립시키는 방향으로 시민 공동체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양심에 따라 도덕법칙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실천적 의지, 즉 선의지를 가지며, 이를 통해 정언명법을 이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칸트의 철학에서 인권은 이러한 도덕적 본성에 근거를 둔다. 인권은 무제한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일반원칙에 의해 모든 사람의 자유와 조화되는 자유를 추구하는 것에 있다.
따라서 인류의 가장 큰 과제는 결국 ‘보편적 법이 지배하는 시민 사회의 건설’이다. 개인들 간 자연상태를 사회계약이 종결하듯, 국가들 간 호전적 자연상태 또한 세계시민법으로 종결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기대이다. 그는 이러한 완전한 시민 정치체제를 위해서는 합법적 국제관계를 형성하고, 국제연맹을 통해 모든 국가에게 안정과 권리를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개인이 인권을 가진다는 것은 그가 한편으로는 민족국가의 구성원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세계시민의 일원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해에서 주권은 인권과 대립하기보다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는 적극적 기능을 가진다. 자신의 저서 『영구평화론』에서, 그는 어떤 국가도 다른 국가의 제도와 통치에 대해 폭력적 간섭을 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각국의 주권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국가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세계 시민적 공동체를 확립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3) 하버마스
그러나 하버마스가 보기에 칸트의 견해는 세계시민 상태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만 바라본 것이다. 그는 칸트가 자본주의의의 발전에 따라 심화되는 사회적 계급갈등과 제국주의의 문제들을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칸트가 말한 세계시민 상태에서 각국은 자기 주권의 고유성을 유지한 채 자유계약을 맺고 있으며, 이는 개별시민이 국내법의 강제에 종속되는 것과 구별된다. 이처럼 각국의 도덕성에만 호소하는 세계시민법은 하버마스의 관점에서는 이상적으로 보일 뿐이다. 하버마스는 칸트가 예견하지 못한 현대의 새로운 국제정세를 지적하면서, 인권과 주권의 관계 또한 새롭게 정립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화는 인류 전체의 상호교류의 장을 만듦과 동시에 문화들 간의 충돌 및 국가주권 간의 갈등의 장소이기도 하다. 초국적 기업의 등장으로 경제는 탈국가화됨에 따라 주권국가를 이루는 국내정치와 국외정치 간 경계는 점차 흐려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된 시대상황에서 요구되는 것은 칸트의 견해처럼 개별국가의 주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별정부를 구속할 수 있는 제도화된 세계시민법을 정비하는 것이다. 과거의 국제법은 내정간섭조항 등을 내포하였으나, 이제는 국가주권을 침해하더라도 보편적 인권선언을 관철시킬 강제집행권의 필요성, 즉 세계시민법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처럼 하버마스는 보편적 인권개념을 개별국가의 주권보다 우선시하는 입장을 제시한다.